나의 이야기

엔타이 순례기(Yantai Pilgrimage)

baeky974 2010. 2. 3. 14:18

 

엔타이 순례기

 

 

2009년 기축년 2월 13일(금)중국 산동반도 석도적산 에 모셔진 해신 장보고참배를 위해 인천국제 공항을통해 동방항공에 몸을 실

 

었다. 엔타이 국제공항(yantai internationnal airport Terminal)에 이륙 후 1시간만에 도착 웨이하이(weihai, 威海)시내로 들어가기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넘어 보이는 풍광은 뿌연안개와 황량한 논과 띄엄띄엄 산재한 낡은 집 간간이 보이는 삘딩을 지나 다운타

 

운으로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웨이하이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야경을 보기위해 호텔주변을 돌아보았지만 평범한 중소도시로 외국인의 시야에 크로즈업 될만한곳이 없었다.

 

피로도 풀겸해서 호텔 옆 족욕 시설에서 휴식 후 목적지인 석도적산을 가기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2월14일(토)

 

목적지로 가기위해 버스를 타고 1시간30분을 달려 석도에 도착 택시를 타고 석도적산 관광공원으로 향했다.

 

석도적산의 위치는 중국 산동성 청도 지역 근처로서 산과 바다를 접하고 있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도시이자 뚜렷한 사계절의 기후를 지닌

 

석도. 중국 산동 반도에 위치한 최동단 지역 석도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 유적지와 해상왕 장보고 위업을 찾아서 다음 장소로 발길을 옮겼

 

다. 1200년 전 해상왕 장보고가 다녔던 해상로가 이번에 재개되면서 석도는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기만 하다.

 

‘동방의 하와이’로 일컬어지는 중국석도는 풍부한 여행자원과 함께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하는 곳으로 큰 기대를 안고 공원 내 투어 카에

 

올랐다.석도의 옛 이름은 적산포(赤山浦)설악산을 분재해서 작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붉은 석산이 석도항 바로 뒤에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

 

다.

 

먼저 적산 명신상이 안치되어있는 건물내부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눈아래 펼쳐있는 석도항과 중국동쪽 끝인 성산두(成山斗)를 바라보면서 당

 

시 전제군주인 진시왕 ‘분서갱유’ 와 불로장생을 위해 남녀어린이 3000명을 동방으로 보냈다는 곳이기도하다.

 

석도항은 중국 북방 최대의 항구로 여류교역의 중심센터인

 

 ‘중국북방어장’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 지역에 사는 조선족은 지난 89년 두 사람에 불과했으나 현재 40여 가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석

 

도에는 중국 바닷가에서 제일 먼저 해상일출을 볼 수 있어 예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곳(중국의 희망봉)으로 일컬어진 성산두가 있다.

적산명신 뒤쪽으로 장보고(張保皐)의 기념관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나의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랑스러운 선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기념관 마당에는 당나라 장수복장의 장보고 동상이 서있었고, 내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없지만 그림과 글로 설명하고 있었다. 기념관 아래, 계곡 물이 흐르는 아늑한 곳이 옛 법화원(法華院) 지(址)이며, 절을 중건하여 옛날의 법화원을 재현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중건 공사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뒷산 붉은 바위 봉우리마다 구름이 걸려 있고 법화원 골짜기 사이로 안개가 휘돌아 산 아래 바다로 내려가고 있었다.

 

장보고는 서주(徐州)에서 무령군을 그만둔 후, 완도 청해진(靑海鎭)을 세우기 전, 이곳 적산포(赤山浦)를 거점으로 신라, 일본 등과 무역을 일으켜 큰 부를 쌓았다. 그는 법화원을 지어 재물과 사전(寺田)을 주어 지원하였다 한다. 인근 신라 촌의 신라인들이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명절에는 모두 모여 같이 즐겼다고 하며, 그가 귀국한 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계속 미친 곳이라 한다. 신라의 혜초(蕙草)스님과 일본의 원인(圓仁)스님도 여기에 장기간 머물면서 장보고의 은혜를 입었다고 그들의 저서에 남기고 있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그의 공적을 기리고 기념탑과 비를 남기고 있었다. 시내 시장 부근에 장가촌(張家村)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가 장보고와 신라인들이 살며 교역하던 신라촌(新羅村)이였는지 모를 일이다. 분명 이 포구 어딘가에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리라.

한편 장보고 기념관 우측으로 일붕선종에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서경보스님의 글씨가 세겨진 기념비가 나의시선을 끌었다.

한국 사람으로 중국 땅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해상 장보고를 기리는 유일한 한글 평화기념 비이기 때문이리라

관광단지내의 10개정도의 건축물과 기념탑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합니다.

-법화원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은 당시 해상 무역으로 삶을 살았던 신라인들이 안정 항해를 기원하고 당시 신라방에 살던 신라인들의 교화처였으며 교민 사회 결속의 매개처 역할을 했던 곳.

법화원은 재당 신라인들에게 있어 만남의 장소이자 교민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심체 역할이 되었다. 또한 신라 교민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열린 장소이기도 했다.석도항으로부터 4km 거리에 있으며 배를 이용, 청도 대련 등지에 닿을 수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장보고 기념탑,적산법화원 북쪽에 위치한 장보고 기념탑은 장보고 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94년 7월24일 준공. 탑길이 19m, 넓이 16m, 높이 1.8m로 탑의 전체 높이는 15m다.-한민족의 얼굴, 장보고통일신라의 무장, 일찍이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 동포를 납치해 파는 만행을 보고 귀국, 신라의 장수가 되었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인근 해적을 소탕하여 연해어업을 보호하고 민간 해상활동의 안전을 보장했다.또한 해양인으로서 북중국, 남중국 및 일본과의 신 해상항로를 개척하고 민간경제인으로서 자유교역을 확대하는 등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신라 문성왕의 사주로 암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해양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우리 민족의 기세는 역사의 뒤안길로 후퇴되고 말았다.

적산관광을 마치고 얼었던 몸을 녹일겸 석도시내로 들어와서 숙소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어촌이라서 열악한 환경이 지만 내일을 기약하면서.....................!?

2월15일(일)

석도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위해시내로 들어오는 차에 몸을 맡기고 차창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도로 곳곳에는 흰 눈과 얼어붙은 아스팔트 그리고 찬바람이 차창을 스치면서 두툼한 옷 속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고 손과 발이시려 몸을 움츠리고 1시간이상 달려 위해시내(威海市內)에 도착 택시를 이용해서 공항에 도착했다.

동방항공에 몸을 싣고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오면서 짧은 일정 때문에 멀리서만 바라본 성산두가 내 내 마음에 걸렸다.